Dr.레이턴시의 어째서 왜? 상대성정신학(Dr.レイテンシーの なぜなに?相対性精神学) 제1강 상대성정신학이란 뭐야?
Dr.레이턴시의 어째서 왜? 상대성정신학(Dr.レイテンシーの なぜなに?相対性精神学)
글 : 浅木原忍
일러스트 : EO
등장인물 소개
등장인물
Dr.레이턴시(박사) (Dr.レイテンシ)
상대성정신학에 빠진 나머지 사회성이 빠져버린 안쓰러운 인간. 세계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상대성정신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완강하게 미독 있다. 미스테리 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
우사쨩(ウサちゃん)
박사의 말에 반박하기만 하는 어시스트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어시스턴트. 거기에다 지각쟁이. 객관주의인 학자의 제자로서 오늘도 박사의 설명에 대든다.
제1강 상대성정신학이란 뭐야?(相対性精神学ってなあに?)
주의
본 책은 픽션입니다. 실재하는 인물, 단체나 현실의 학문과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또 이 책의 내용은 저자 개인의 견해이며, 「상대성정신학」의 공개설정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제1강 상대성정신학이란 뭐야?
박사 모두 처음 뵙겠습니다. Dr.레이턴시입니다. 박사라고 불러줘. 오늘부터 모두와 함께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쪽이 제 어시스턴트를 맡고 있는...
우사 어시스턴트 겸 마스코트 우사쨩입니다-. 우사미미 별에서 찾아온 마음은 17세[각주:1]. 참고로 우사미미 별은 케이힌토후쿠 연선에 있답니다.
박사 뜬금없이 이상한 소잿거리로 시작하지 말아줄래.
우사 그것보다 박사님, 오늘부터 우리들은 상대성심리학에 대해 공부하는 거지!
박사 상대성정신학이란다, 우사쨩. 정말 지극히 성대하게도 틀렸지만, 상대성정신학은 일반적인 심리학과는 방향성이 다르니까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렴.
우사 어떻게 다른데?
박사 음,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성정신학이란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애초에 상대성정신학이라는 학문을 확립한 것은...
우사 예예 잠깐 스톱 박사님. 지금은 역사 수업시간이 아니라고! 대체 누가 몇 년에 상대성정신학을 제창했다던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그런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니까!
박사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긴 하다만...뭐, 상대성정신학의 역사부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만들어져 버리니, 이야기가 복잡해지니까 오늘은 생략하도록 하자.
우사 와~.
박사 그럼, 일단은 상대성정신학이란 무엇인가, 부터인데...
우사 즉, 한 마디로 하자면?
박사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면 이 고생은 안 하지. 잘 모르는 사람은 철학이라던가 심리학의 일종이라던가, 좀 더 나아가면 정신의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히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만, 철학도 심리학도, 상대성정신학의 한 측면에 지나지 않아. 오히려 상대성정신학의 사고방식은 물리학--우주론이나 양자역학의 사고방식이 출발점이라고 해도 되지.
우사 우주론과 양자역학? 우와아, 뭔가 어려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박사 그렇지, 근데 이건 네 전공이지 않았니. 뭐, 갑자기 영자역학 얘기부터 시작하면 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포기할 것 같으니... 역시, 일단은 상대성정신학의 첫 번째의 기본인 주관주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우사 주관주의?
박사 그래. 상대성정신학이란 것은, 주관과 객관에 대해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 사고방식의 한 예로서, 꿈에 대해 생각해보자꾸나.
우사 내 꿈은 특허나 집세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으로 연봉 1억 엔.
박사 너의 허망한 꿈 말고, 잠자고 있을 때 꾸는 꿈 말이란다. 모두들 침대 속에서 꿈을 꾸고 있을 때, 그것이 꿈이라고 알고는 있을? 물론, 꿈을 꾸고 있는 도중에 꿈이라고 눈치를 채는 꿈--자각몽이라는 개념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은 꿈을 꾸고 있을 때, 그것이 꿈이란 걸 알지 못해. 침대 위에서 눈이 뜨이고, 처음으로「아, 꿈을 꾸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니?
우사 꿈. 꿈을 꾸고 있다. 매일 꾸는 꿈. 끝이 보이지 않는 꿈. 붉은 눈. 붉게 물들어버린 세계[각주:2].
박사 붕어빵 도둑[각주:3]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 어쨌든 우리들은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 꿈 속의 세계가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부조리하고 지리멸렬이긴 하지만, 그걸 우리들은 꿈을 꾸고 있는 도중에는 의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즉, 꿈을 꾸고 있을 때, 우리들에게는 꿈 쪽이 현실이라는 거야.
우사 하지만 꿈은 꿈이잖아? 눈을 떠버리면, 네, 거기까지잖여.
박사 우에키 히토시[각주:4] 얘기도 아니라니깐. --꿈과 현실의 구별이라는 것은, 원래 무척 애매한 것이야, 우리들은 지금 깨어나서 현실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이 기나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건 대체 누가 보증해줄 수 있는 걸까?
우사 그런 이야기라면 엄청 많이 있지. 영화로는 「토탈 리콜」이라던가 「매트릭스」라던가「인셉션」이라던가. 지금 있는 세계가 현실인가 아닌가, 라는 건 「클라인의 병」같은 VR물로도 잘 알려져 있고. 날조된 현실, 이라는 모티브라면 필립 K 딕[각주:5]라던가, 칸바야시 쵸우헤이[각주:6]라던가 그런 사람들이 잔뜩 쓰고 있지.
박사 갑자기 능변가가 되었구나 우사쨩. 애초에 이 꿈과 현실의 의문은, 장자의 「호접몽」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인류는 2천년 이상이나 꿈과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신비함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왔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럼, 상대성정신학은 그 의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면...꿈과 현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우사 꿈과 현실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박사 그래. 지금 우사쨩이 들고 있는 예의 작품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대체로 픽션을 두고, 현실에 대치되는 <꿈>은 <허구>와 거의 동일한 의미란 거지. 즉 「리얼 완전한 수장룡의 날」같은 사이코 타입물과, 「클라인의 병」같은 버츄얼 리얼리티물의 사이에는 가젯이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그렇게 차이가 없어.
이 작품들에 공통되는 사고방식은, <현실>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고한 것, 이라는 건 신앙이야. 그러니까 그 곳에 꿈이나 VR이라는 <허구>를 대치시켜서, <현실>의 절대성을 흔들으려고 해. 「토탈 리콜」이나「인셉션」의 마지막 장면이 현실인가 꿈인가,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작업은 역설적으로 제작자에게도 시청자에게도, <현실>이라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어. 그러니 더더욱, 허실의 불확실성으로 시청자를 붕 뜨이게 하는 수법이 성립하는 거야.
하지만, 상대성정신학에 있어서는, 꿈과 현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서, 그것이 꿈인 것인가 현실인 것인가, 라는 의문은 대개 의미가 없어.
우사 딱히 어느 쪽이든 괜찮잖아, 라는 의미?
박사 그런 식으로 듣자니 될대로 되라는 듯한 느낌이지만... 예를 들자면 「토탈 리콜」의 마지막에 아놀드 슈와제네거가 있는 화성은 현실인 것인가 꿈인 것인가, 관객으로서는 판단을 할 수가 없는데.
우사 제작자 측에서는 아시○꿈으로 하려고 했던 거 아니었던가?
박사 그렇지. 하지만 상대성정신학에 있어서는, 그걸 결정하는 것은 슈워제네거가 연기하는 주인공 자신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어. 그가 있는 화성을 현실이라도 인식해서, 계속 그 세계에서 산다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현실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건, 지금 이렇게 여기에 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야. 내가 지금 스스로의 인식으로는 눈을 떠서 현실의 세계에 있을 셈이지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어. 그러니 우리들은 현실을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스스로가 <현실>에 있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거야.
그렇다면, 꿈을 꾸고 있을 때의 <나>와, 지금 이 현실인 듯한 세계에 있는 <나>와의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다는 거지? 왜냐하면, 꿈 속에 있을 때의 <나>에게 있어서는 이 꿈 속이야말로 현실이니까.
이 사고방식을 상대성정신학에서는 「절대적주관주의」라고 불러.
우사 하지만 꿈은 꿈이잖아? 객관적 재현성이 없는 것을 현실이라고 억지 부려도, 물리학의 종으로서는 그건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이잖아,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
박사 그러니까 그것이 상대성정신학의 최대의 적이라는, 사악한 객관주의란 거야. 그런데 우사쨩, 애초에 <객관>이란 뭐지?
우사 그야 주관에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주관을 통해서도 바뀌지 않는 것. 예를 들자면 지금 박사가 입고 있는 백의는 누가 봐도 백의잖아?
박사 정말로 그럴까? 있지 우사쨩, 내가 입고 있는 백의의 하얀 색과 우사쨩이 입고 있는 백의의 하얀 색은 정말로 같은 것일까?
우사 우와아, 철학이다아.
박사 지금의 물리학은 실질적으로 철학이라고 말한 건 그쪽인데...
우사 아니 뭐, 색각 이상이 있는 사람--예를 들으면 적색과 녹색의 구별이 어려운 사람이 보고 있는 색은, 보통의 색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고 있는 색과는 다르다는 건 알아. 일러스트에서 피부의 색이 어딘가 건강하지 못해 보이는, 탁한 느낌을 가진 사람이 가끔식 있긴 하지만, 아마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게 평범한 피부색이겠지, 라는...
박사 그렇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해하기 쉬운 것은 그런 예지. 남은 건 그것이야 말로 환각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떤 이상이라도 그것이 현실이라던가.
우사 예를 들자면 히나ㅁ,
박사 관계없는 작품의 스포일러는 그만두렴.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보고 있는 사람의 주관에 의해서,
보고 있는<현실>은 천차만별이라는 거야. 우리들은 모두가 자신의 오감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뇌가 처리하는 것에 의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어. 즉, 우리들이 보고 있는 <현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뇌 안에만 있다는 것이야. 현실이란, 망막이라는 모니터에 비추어진 버츄얼 공간에 지나지 않아.
우사 으~음, 극론이네.
박사 그렇게 사고정지를 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런 식으로, 누군가 자신이라는 주관을 통하는 것으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이 모든 상대성정신학의 출발점이야. 같은 것을 보고 셈이라도, 우리들이 정말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확신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리들은 타인의 주관을 완전히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해. 상대성정신학에 있어서는 관측불능성에 의한 불확정성을「주관의 상호불가침」이라고 불러.
이것이, 상대성정신학의 대전제.
그건 그렇고 우사쨩. 이 사고방식을 더욱 파고들어가면 어떤 생각이 될지 알겠어?
우사 어떻게 되는데?
박사 객관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거야. 있지 우사쨩, 과학적인, 이라는 건 단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걸까?
우사 재현성이 있는, 이라는 거지!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행하면 같은 결과가 나온다. 계산으로도 실험으로도 말이야.
그렇게 재현성이 인정된 것만이 올바른 법칙. 어떤 멋진 실험결과라고 해도, 한 번으로만 성공한 것, 세계에서 한 명만 성공한 것은, 과학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지.
옛날에 옳다고 생각된 것이라던가, 대발견이라도 생각되는 것도 그렇게 부정되어왔어.
물론, 현대 과학에서 증명되지 않은 문제는 있으니까, 현시점에서 재현성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 모두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객관적 재현성만이 과학적 정확성에서 제일 기본이 되는 원리야.
박사 그래. 그것이 20세기적 과학의 죄야, 우사쨩.
우사 에엥?
박사 20세기적인 과학의 최대의 죄는 다이너마이트도 독가스도 핵무기도 아닌, 이 세계에 <절대불변의 객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오해를 낳은 것이야.
우리들은 모두가 주관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어. 세계 속 한 명도 예외없이 말이야. 그래서 우리들의 주관은 상호불가침.
타인의 주관은 관측할 수 없고, 공유 할 수 없어. 라는 것은 그 주관이 얼마나 모여도 그것은 <객관>이 될 수 없다는 거야.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주관을 통해서 보고 있는 이상 주관적인 인식에 지나지 않아. A라는 실험에 대해서 나온 B라는 결과가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도 B라는 결과일지 어떨지는 누구도 확정할 수 없지.
우사 아니아니아니, 박사. 그런 엉망진창인 얘기 하지 말아줄래. 그야, 보고 있는 사람의 생각에 의헤서 사물의 인식은 바뀌지만,
물리법칙은 변하지 않아. 과학에 의한 객관이라는 것은, 그런 생각을 물리치고 사실과 이론을 추궁하는 거라니까.
박사 정말로 그럴까. 우리들은, 인식으로부터 완전히 주관을 물리치는 게 가능할까? 물리법칙을 우리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거지?
주관에 의해서, 야. 물리법칙도 주관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어.
우사 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구의 중력이 변화해서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그러면 누구도 고생은 안 하지. 뉴턴과 라이트 형제에게 사과하라구.
박사 후후, 그렇지. 우리들은 모두 주관적으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 세게에는 <객관>인 듯한 것이 존재하고 있어.
대체 그것은 어째서인건가? 우리들은 상호불가침의 주관만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어. 나의 주관과 우사쨩의 주관은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본래 나와 우사쨩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을텐데. 하지만 우리들은 어쩌다 보니 같은 것을 보고, 똑같이 세게를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어.
즉, 나의 주관과 우사쨩의 주관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에 의해서, 그 곳에 <객관>이라고 불리고 있는 정체를 모르는 무언가가 생겨나.
이 세계는 개인의 정신의 상대적 상태에 의해 성립하고 있어. 복수의 주관이 모이는 것으로 발생하는 <객관>이란,
즉 주관의 상대성에 의해 생겨나는 것. 영어로는「Relativity Subjectivitical」이니까, 원래 올바른 단어로는「상대성주관학」이지.
단, 일본에 들어왔을 때에「상대성정신학」이라는 의역이 널리 퍼져버려서, 일본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어.
당시의 일본인에게는 어쩌다 보니 심리학과는 다른 것이라고는 알아도, 「주관학」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되어서, 이상한 번역으로 했던 거겠지.
처음에 우사쨩이 상대성심리학이라고 착각했던 것처럼, 착각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네이밍이니까, 본래의 이름에 맞추자는 움직임도 있긴 하지만.
우사 그러고 보니 결국, 심리학과는 어떻게 다른 거야?
박사 심리학이란 것은,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통계적으로 정리하여 패턴을 유출해내는 것으로, 그 메커니즘을 해명하려고 하는 학문이야.
A라는 대상에 B라는 감정이 발생할 때, 어느 정도의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어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가, 를 통계적인 일반화에서 알려고 하는 것이 심리학.
...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심리학이 직업이신 분, 틀렸다면 미안해요.
그에 대해서 상대성정신학은, 애초에 통계나 일반화라는 개념을 부정하는 부분에 있어. 타인의 심리의 메커니즘이 자신에게도 통용된다,
또는 그 반대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주관에 대한 지극히도 소박한 인식이야.
우사 그래도, 그 일반화가 있는 정도로 유효하니까 심리학은 성립하고 있는 것이지?
박사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렇지. 예를 들자면 우사쨩, 초등학교에 다닐 때「자기가 당했을 때 싫은 일은 남에게 하지 맙시다」라는 말 들어본 적 없어?
우사 아-, 그런 말 들어봤지 들어봤어.
박사 그 논리면, 반대로 말하자면 「자기가 당했을 때 싫지 않은 일은 남에게 해도 좋다」라는 게 되잖아?
거기에서 자신이 당해도 기쁜 일은 타인에게도 해주자는 선의의 논리가 성립해.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싫은 일이 우사쨩에게는 너무나도 싫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고,
나에게 되게 기쁜 일이 우사쨩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라고 할 수 없어. 고로, 이 논리에 의하면 악의가 없는 괴롭힘도 고마운 민폐인 선의의 강매도 정당화되고말아.
우사 말씀하신대로.
박사 이것은 상상력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것 같이, 돌려서 말해 상상력이 결여되었다는 거지만, 이런 말이 교육의 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 자체가,
상대성정신학에 관한 몰이해의 상징이며, 주관의 절대성에 대한 무지를 기반으로 한 20세기적 정신의 망령인 것이지.
즉 이것은, 상대성정신학과 심리학의 혼동이기도 하며, 이 뒤에 자세히 설명할 <주관>과 <객관>의 혼동이야.
「자기가 당했을 때 때 싫은 일은 남에게 하지 맙시다」라는 논리는 겉으로 보면 논리정연해보이며, 실은 싫어하는 것, 기쁜 것이라는 주관적인 인식을 타인에 대해서도 똑같다고 생각하는 유효한 <객관>이라고 착각한,
파탄이 난 논리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것을 의구심 없이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만.
우사 아, 종소리 울렸다. 박사, 시간 다 됐어ー.
박사 내가 하는 말 제대로 듣고 있었던 거야? 뭐, 마침 슬슬 끝내도 될 부분이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번에는 상대성정신학에 의한 <객관>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데에서, 일단은 우리들이 가진 <주관>에 대해서, 조금 더 파헤쳐보도록 하자. 그럼, 다음 번에도 잘 부탁해.